우리 겨레가 간직해 온 참으로 넉넉한 시 노래
시 조는, 예부터 내려오는 문학 양식 가운데서 오랫동안 수많은 이들이 짓고 부르면서 가장 많은 작품이 전하고 있는 갈래이다. 4음보 3장이라는 정형시 형식이지만, 그다지 빡빡하지 않은 넉넉한 형식이다. 거기에 자신만의 내밀한 감흥을 소화할 수 있는 서정 구조와 담백하고 온아한 미의식 같은 특질이 바로 시조가 오랜 생명력을 가질 수 있도록 하였다.
그래서 고려 말부터 지금까지 위로는 임금 정승에서 아래로 나무꾼, 기생까지 상하와 남녀를 초월해서 우리 겨레 누구나 즐겨 짓고 불렀다.
시조의 역사는 진보해 왔다.
그 뿌리는 멀리 향가나 고려 가요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나, 그래도 시조는 조선 사대부들에게서 시작되어, 그들의 세련된 미의식 속에서 꽃피었다. 이현보, 이황, 권호문, 정철, 신흠을 거쳐 윤선도에 이르면 사대부 시조는 정점에 도달한다.
17세기 후반 가곡창을 대신하여 시조창이 널리 보급되었다. 시조창은 좀더 빨라지고 생동감 있는 창법으로, 이러한 시조창의 보급과 시조 향유층이 중인 이하 평민으로 확대된 것과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조 선 후기를 보면, 시조를 짓고 부르는 사람들이 늘어나다 못해, 무게 중심이 평민으로 바뀐다. 이전의 사대부들이 한시로 모자란 것을 시조로 채우거나 또는 한시와 시조를 나란히 썼던 것과 달리, 평민들은 시조를 통해서 비로소 자신들의 절실함을 표현하였다. 현실의 모순을 풍자하고, 고달픈 삶을 해학으로 풀어 버리는 등 대단히 생활에 밀착해 있는 미의식을 보였다. 그러면서 가집歌集을 편찬하였다.
가집의 탄생, 김천택 《청구영언》을 엮다.
한시와 시조를 나란히 썼던 조선 사대부의 대표 이황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의 시(한시)는 옛날의 시와 달라서 읊조릴 수는 있지만 노래 부를 수는 없다. 노래로 부르려면 반드시 우리 말로 엮어야 한다.”(‘도산십이곡’에 붙이다.)
영조 때 문인 정윤경은 《청구영언》 서문을 쓰면서 말하였다.
“생각건대 가사를 짓는 것은 문장과 음률에 정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데, 시를 잘 쓰는 사람이라고 노래를 반드시 잘하는 것이 아니며 노래를 잘하는 사람이라고 반드시 시를 잘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역대로 문인이 적지 않으나 가사를 지은 이는 거의 없다. 겨우 있다 하더라도 후세에 전할 수가 없었다. 나라에서 문학만 숭상하고 음악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정윤경이 그렇게 격려하건만 김천택은 여전히 겸손하다.
“무릇 문장과 시는 세상에 나아가 후세에 영원히 전하여 천년을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노래는 꽃잎이 바람에 날리고 새와 짐승의 좋은 노래가 귓전을 스쳐 사라지는 것과 같다. 한때 입으로 불린 후에 자연 흩어져 사라져서 후세에는 전해지지 않으니, 개탄스럽고 아깝지 않은가.”
가집에서 시조 1,053수를 건져 올려《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를 엮다.
이 책은, 북에서 낸 조선고전문학선집3 《시조집》을 남에서 다시 펴내는 것으로, 《청구영언》 《해동가요》 《가곡원류》 《남훈태평가》 《청구가요》 들에 전하는 시조를 거의 다 골라 1,053수를 담되, 오늘날 독자들이 보기 좋도록 주제별로 갈래지어 엮었다.
《청구영언》은 가집의 시초로, 이후의 모든 가집은 청구영언의 성취에 조금씩 덧붙인 정도이다. 이 책의 시조는 《청구영언》에서 온 것이 절반 이상이다.
시조라는 문학―음악 장르에 관한 본격 비평 자료들을 총망라해서 담았다.
우 리 조상들은 시조에 관해 어떻게 보았을까? 선인들의 시조 관련 비평글들을 두루 다 실었다. 김천택이 쓴 《청구영언》 서문과 주시경 선생의 《해동가요》 발문을 비롯 여러 사람들이 가집에 쓴 서문과 발문을 실어, ‘문학과 음악’, ‘한시 문학과 자국어 문학’ 등에 관한 문예관, 미학 사상을 다 담았다.
이현보가 ‘어부가’를 쓰고 난 뒤 적은 글, 이황이 ‘도산십이곡 뒤에 쓴 글’ 들에서 당대 사람들, 특히 사대부 작가들이 자신이 시조를 쓴 까닭을 들여다볼 수 있다.
가 집 편찬자들이 시조 작가들에 관한 단평을 해 놓은 것들도 실어, 조선 후기 시조와 시조창, 작가들에 관한 당대 사람들의 견해를 살필 수 있다. 특히 이 자료는, 중인층의 시조 문학에 관한 언급으로, 사대부 중심의 한문학이 주류였던 문학의 지형이 확대되는 것에 관해 당대 사람들은 어찌 보았는지를 살필 수 있다. 비평의 영역이 평민 작가들을 포착하고 있는 현장을 담은 소중한 자료이다.
겨레고전문학선집을 펴내며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제 너머 성 권농 집에 ㅣ 용같이 잘 걷는 말에
띠 없는 손이 오거늘 ㅣ 벗 따라 벗 따러 가니
이화에 월백하고 ㅣ 춘산에 불이 나니
매아미 맵다하고 ㅣ 제 우는 저 꾀꼬리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눈물이 진주라면 ㅣ 동짓달 기나긴 밤을
청초 우거진 골에 ㅣ 보거든 꺾지 말고
새벽 서리 지샌 달에 ㅣ 엊그제 님 이별하고
내 가슴 슬어 난 피로 ㅣ 산은 옛 산이로되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춘산에 눈 녹인 바람 ㅣ 가마귀 너를 보니
조으다가 낚시대롤 잃고 ㅣ 세차고 크나큰 말에
오동에 듣는 빗발 ㅣ 달 밝고 서리 치는 밤에
어리거든 채 어리거나 ㅣ 가마귀 검으나 다나
가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내 해 좋다 하고 ㅣ 반중 조홍감이
눈 맞아 휘어진 대를 ㅣ 나무도 아닌 것이
잘 가노라 닫지 말며 ㅣ 하늘이 높다 하고
진실로 검고자 하면 ㅣ 물아 어데 가느냐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줄이 있으랴
이런들 어떠하며 ㅣ 백설이 잦아진 골에
한산섬 달 밝은 밤에 ㅣ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풍상이 섞어 친 날에 ㅣ 삼동에 베옷 입고
천만리 머나먼 길에 ㅣ 불여귀 불여귀하니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렸더니
연하로 집을 삼고 ㅣ 고산 구곡담을
아침은 비 오더니 ㅣ 청산도 절로절로
산촌에 눈이 오니 ㅣ 짚방석 내지 마라
앞내에 안개 걷고 ㅣ 한식 비 갠 후에
오동 열매 동실동실하고 보리 뿌리는 맥근맥근
흐리나 맑으나 이 탁주 좋고 ㅣ 두꺼비 파리를 물고
오동 열매 동실동실하고 ㅣ 댁들에 나무들 사오
제 얼굴 제 보아도 ㅣ 논밭 갈아 기음매고
일신이 살자 하니 물것 겨워 ㅣ 생매 잡아 길 잘들여
님만 여겨 펄쩍 뛰어 뚝 나서 보니
이 몸이 ?여져서 ㅣ 간밤에 지게 열던 바람
귀또리 저 귀또리 ㅣ 벽사창이 어른어른커늘
대천 바다 한가운데 ㅣ 바둑이 검둥이 청삽사리 중에
물 없는 강산에 올라 ㅣ 간밤에 자고 간 그놈
부록
시조에 대한 옛사람들 글
시조와 시조집에 대하여 - 김하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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