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홍, 벽성선, 일지련, 윤 소저, 황 소저, 양창곡. 벗이자, 애인이며, 전우이고, 동반자인 이 여섯 인물이 이루어 가는 섬세한 사랑 이야기를 담았다. 남녀의 연정을 애틋하게 올올이 수놓는가 하면, 검이 부딪치며 내는 섬광까지 탁월하게 묘사했다. 당대 사회에 대한 치열한 비판이 들어있고, 풍부한 생활의 실감이 배어 있다. 살아 움직이는 인물을 창조해 저마다 강렬한 개성을 가진 인물들이 새로운 시대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 원문을 실어 옛 모습도 살펴볼 수 있다.
<구운몽>처럼 영원한 도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욕망에 충실하다.
<옥루몽> 무늬는 <구운몽>과 비슷하나, 들여다보면 둘은 퍽 다르다. 하늘나라에서 선관 선녀 여섯이 석가세존의 연꽃 한 송이를 가져다 놓고 시 짓고 술 마시며 흐드러지게 놀다가, 석가세존과 관음보살의 뜻으로, 지상으로 내려온다. 남자 하나와 여자 다섯이 서로 인연을 맺어 가며 애정을 쌓고 세상에 나아가 명예를 성취하며 복을 누리다가, 다시 하늘로 올라간다. <옥루몽>과 <구운몽>은, 신선계의 존재가 이 세상으로 적강 y降한다는 것이나, 적강한 뒤 세속에서 누리는 복된 삶이 꿈인 양, 환몽 구조를 띤 것들이 닮아 있다. 또 남자 하나를 두고 여러 여자들이 저마다 사랑을 맺으며 경쟁하는 따위(쟁총 모티브)가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옥루몽>에서, 천상의 세계는 지면 비중으로나 주제에 미치는 영향이나 아주 약하다. <옥루몽>의 주인공들은 천상의 영원한 도를 얻고픈 것이 아니며, 해탈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이들은, 지금 내가 사는 세상에서 내 뜻이 관철되기를 바라는 근대적 지향, 현실 지향이 뚜렷하다.
저마다의 개성이 빛나는 인물들. 인물 창조에서 뛰어난 성취를 보여 준다.
근대 소설의 성취는, 이야기 줄거리보다 얼마나 강렬한 인물을 창조했느냐, 세인들의 가슴에 잊히지 않는 인물을 안겨 주었는가 아닌가로 살필 수도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 가운데 여성들 다섯은 저마다 다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다. 다섯이나 되는 여성들이 자신의 성격을 잘 보여 주고 여러 가지 사건을 겪으면서 본디 성격을 잘 발전시켜 간다. 캐릭터 창조에 크게 성공했다. 양반집 딸로 더없이 넉넉한 윤 소저, 역시 양반집 딸로 특권 의식에다 질투심까지 보태져 물불 안 가리고 딴 여인을 제거하고자 날뛰는 황 소저, 출신은 기생이나 신선처럼 깨끗한 그림 같은 여인 벽성선, 오랑캐 땅에서 태어나 자색과 미모가 다 출중하나 중국으로 귀화해서는 더없이 순한 시골 아낙네로 살아가는 일지련, 그리고 한 사람, 그 누구보다 우뚝한 강남홍!
우뚝 선 주인공 강남홍! 강하면서 아름답고 생기발랄하다
그 중 한가운데 우뚝 선 인물이 강남홍! 강남홍은 사랑이 넘치는 여성으로 낭군을 위해 헌신하면서도 자기를 잃는 희생으로 나가지 않고 제 길을 잡아서 제 뜻도 성취한다. 슬기로운가 하면 애교스럽고, 깊은가 하면 발랄하다. 그래서 이 여성의 일생은 영웅의 일대기이다. 강남홍은 기생으로 선비 양창곡을 만나, 사랑을 지키기 위해 물로 뛰어드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부활해 여장군으로 거듭난다. 전쟁 영웅으로 우러름을 받고 벼슬도 받는다. 실제로, <구운몽>에서는 성진→양소유→다시 성진의 구조인데, <옥루몽>에서는 문창성군→양창곡→강남홍으로 구조가 짜여 있다. 관음보살이 강남홍의 꿈을 깨우면서 소설이 끝난다. 독자들은 누구나 강남홍이 중심에 서 있음 알며, 강남홍의 열렬한 팬이 된다. 이렇듯 뛰어난 영웅을 양반집 규수로 설정하기는 힘들었을 터, 홍이 타고난 신분은 기생이다. 이런 점도 더 깊이 공부해 볼 일일 듯하다.
나를 알아주는 이를 만나고 싶은 강렬한 소망.
연애 소설의 옷을 입었으나 이러한 낭만성이 근대적 지향이리라.
분명 이 소설은 아주 재미난 연애 소설이다. 요즘 입맛에도 딱이다. 만나자마자 숨이 막힌다. 서로를 알아본다. ‘이제야 나를 알아주는 이를 만났구나.’ 하는 경이적인 순간이다. 강남홍, 벽성선, 일지련, 윤 소저, 황 소저, 그리고 양창곡. 다섯 여인과 한 남자가 벗으로, 애인으로, 전우로, 동반자로 관계를 맺는다. 그 어떤 말보다 이들이 가장 좋아한 말은 바로 지기 나를 낳아 준 이는 부모요, 나를 알아주는 이, 나를 살아 있게 하는 이는 지기라. 지기를 만나고자 하는 소망은 소설 속 모두에게 간절하다. 제 이름을 얻고 싶은 근대적 지향일까. 이것은 그저 규중 아녀자의 바람이 아니다. 여성이 선비임을 자처한다. 이 소설에서 남녀가 지기가 되자 맹세하는 것은 분명 봉건적인 틀을 벗어나고자 함이다.
신분과 지체보다는 능력과 개성이 꽃피길 간절히 바라며 썼다.
양창곡과 둘레 다섯 여인 사이를 가로지르는 섬세한 사랑의 그물은 이 소설의 기본축이 애정 관계임을 또렷이 해준다. 창곡과 강남홍 등 여성들은 오랑캐와 싸울 적에도, 조정 안의 부패 타락한 관료들과 싸울 때도 언제나 함께 힘을 합친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진정한 벗은 양반가에서 자란 윤 소저나 황 소저가 아니다. 기생 출신 여인 둘(강남홍과 벽성선)과 오랑캐 출신 일지련이 창곡에게 큰 힘이 된다. 출신이 천하고 지체가 낮은 이(비주류)가 주인공으로 나서고 있다. 힘없는 백성들에게 큰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시인이 시에 섰듯이, 우리는 누가 내게 꽃이라 불러 주기를 기다린다. 알튀세르의 호명 이론이 밝혔듯이, 근대인들은 내 이름을 불러 주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당대 사회를 보며 비판의 살을 겨눈다.
그래서 관력을 쥔 기득권층과 싸우지 않을 수 없다. 이 소설의 악인은 오랑캐 족속이 아니라, 조정 안의 낡은 관료들이다. 오랑캐는 교화하여서 손 잡고 함께 살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안의 적들은 교화 불능이다. 정책을 두고도 사리사욕을 앞세우는 자들, 황제를 허황한 미신 놀음으로 이글어 눈과 귀가 멀게 하는 자들, 오랑캐가 쳐들어와도 제 잇속을 챙기는 자들. 창곡과 여인들은 이들과 맹렬하게 싸운다. 19세기가 세도 정치가 극에 달하고 백성의 원성이 치솟았던 점을 떠올려 본다. 꽤 복잡한 장편 소설인데, 북의 학자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옥루몽>의 기본 주제는 사랑이다 ― 북의 학자 김춘택의 해설에서
“주인공 양창곡을 한쪽으로 하고 강남홍, 벽성선, 일지련, 윤 소저, 황 소저를 다른 쪽으로 하는, 일부다처 관계로 맺어진 인간관계에서 보는 기구한 사랑을 들 수 있다. 양창곡은 봉건 도덕규범과 신분 차이에 얽매임 없이 강남홍, 벽성선, 일지련 등을 사랑한다. 조정 관료인 황 승상이 황제의 힘을 빌려 자기 딸 황 소저를 양창곡한테 시집보내려고 꾀하였을 때, 창곡은 남녀간의 성례는 “비록 여대 하천이라도 은의로 합하고 위세로 겁박지 못할 바이어늘” 하며 반대한 탓으로 한때 강주 땅에 귀양 가기도 하였다. 다음으로 양창곡, 강남홍, 일지련의 형상에서 보는 반침략 애국 사상, 양창곡을 비롯한 긍정인물들과 노균, 동홍, 한응덕, 황 각로 등 간신들 사이의 갈등을 통하여 보여 준 봉건 통치배들 내부의 호상 알력과 세력 다툼, 황제를 비롯한 관료들의 부패 타락과 부귀공명에 대한 비판, 양창곡의 운명선에서 보는 ‘입신양명’과 ‘부귀영화’ 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위에서 본 문제들은 서로 연관이 없는 별개 이야기로 엮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기본 문제, 곧 주인공 양창곡과 강남홍, 벽성선, 일지련 등 여인들과의 사랑 이야기와 맞물려 있다. 양창곡과 여러 여인들이 ‘천상 옥경’에서 지상으로 내려오는 것도 이른바 불도를 어기고 ‘옥루풍월’을 즐긴 죄 때문이기는 하나, 사실은 그들 사이의 연분과 계기를 말해 주는 것이다. 말하자면 불교의 계율로 하여 천상 옥경에서는 마음대로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현실의 인간 세상에 내려와 이룰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양창곡과 간신들 사이의 알력과 양창곡, 강남홍, 일지련 등의 반침략 애국 투쟁에 대한 인상 깊은 묘사들은 그들의 정의로운 성격적 특성과 순결한 사랑 관계를 보여 주려는 의도와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
이렇게 놓고 볼 때, <옥루몽>의 주제 사상적 내용의 중심은 하나의 기본 문제, 곧 양창곡과 여인들 사이의 사랑에 관한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소설은 바로 이러한 이야기를 엮어 나가면서, 그들의 사랑을 가로막는 사회적 악덕과 봉건 위정자들의 전횡을 비판하는 동시에 사람은 봉건적 구속과 인습, 신분 관계의 엄격한 한계에 매임 없이 서로 의리를 지켜 사랑해야 한다는 사상을 밝히고 있다.”
겨레고전문학선집을 펴내며
선관 선녀가 달구경하며 술에 취하였구나
압강정에서 지기를 만나니
양 공자와 홍랑, 항주에서 엇갈리다
강남홍이 사내도 되고 계집도 되는구나
질탕한 뱃놀이, 떨어지는 꽃 한 송이
죽을 고비 넘기고 아득한 바다를 떠도누나
하늘소 타고 오던 길, 살진 말 타고 돌아간다
윤 소저와 혼례하자마자 귀양 길에 올라
벽성산에서 새 인연을 얻다
임금이 양창곡과 황 소저를 중매하다
여인의 간게가 더없이 흉악하구나
양 원수, 천기를 읽어 흑풍산을 불태우니
“양 원수가 넷 있음을 모르는고?”
소년 장수 홍혼탈
봉황 암수가 서로 겨루는도다
- 옥루몽 1 원문
- 옥루몽의 주제 사상 · 김춘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