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에서 발굴한 고전 소설, 북에는 고전 소설이 풍성하다
< 겨레고전문학선집> 29번째 소설은 바로 앞 <옥포동 명판관 두꺼비>(겨레고전문학선집 28)와 함께 북에서 찾아낸 고전 소설이다. 1980년대에 우리 고전 유산 발굴 사업을 크게 벌인 결과 얻은 성과이다. 북쪽 겨레는 우리 고전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다. 외래 문화는 차단하고 우리 것을 인민대중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보급하고 있다. 특히나 남에서는 고전 소설이 몇몇 가지만 인기 있고 연구나 보급도 그것들에만 치우쳐 있어, 꼽아 보면 10편 남짓하다.
남에서는 제목조차 낯선 소설들이 북에서는 긴 원문 그대로 출간되는 일이 많다. 물론 고전 소설을 어린이용 그림책으로 바꾸는 일도 많다. 어려서 무슨 책을 읽고 자랐는가가 원초적인 감성에 관계된다고 하면, 북쪽 겨레와 남쪽 겨레 사이엔 ‘같음’ 한켠에 ‘다름’이 있다.
<천 년을 돌아온 사랑>은 어떤 소설인가?
이 책의 본디 제목은 <란초재세기연록蘭焦再世奇緣錄>, ‘난지와 초중경이 다시 태어나 만나는 기이한 이야기’라는 뜻이다.
중 국에 고대로부터 전해 오는 옛 시 가운데 ‘공작동남비孔雀東南飛’가 있는데, 가난한 집안에서 벌어지는 비극을 담고 있다. 초중경焦仲卿의 아내 난지蘭芝가 시어미에게 구박을 받다 결국 시집에서 쫓겨나고 만다. 시어미는 아들을 부잣집 딸과 혼인시키고자 하였으며, 난지의 친정 오라비는 난지를 태수의 아들에게 시집보내려 한다. 난지는 남편과 약속한 변치 않는 진실한 사랑을 지키기 위해 연못에 빠져 죽고, 남편 중경 또한 동남으로 뻗은 나뭇가지에 목매어 죽는다.
이 시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에 올라 모방작도 많을 뿐더러, 현대에도 여러 갈래로 번안되고 각색되었다.
조 선 후기에 소설이 크게 일어나면서 ‘공작동남비’의 후일담 소설이 나왔는데 바로 이 소설이다. 주인공 남녀는 석가세존 앞에서, 다음 세상에서는 사랑을 꼭 이루게 해 주십사 하는 것뿐 아니라 부귀하게 태어나게 해 달라고 빈다. 그 소원대로, 각각 황제의 딸과 재상의 아들로 환생하여, 난관을 뚫고 사랑을 이룬다. 당시 백성들이 소설에서 기대하는 낭만성과 세속적인 욕망을 고스란히 풀어놓은 셈이다.
소설의 시대, 백성들의 왕성한 창작 욕구
조선 후기엔 익명의 예술, 익명의 대중 문화가 활짝 피어난 때이다.
이 름을 밝히지 않아, 기성의 무엇에 매일 필요 없이 자유로울 수 있다. 모방작을 만들기도 하고 아류작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림도 또 소설도 그렇다. 사람들은 자기가 읽은 것을 따라 써 보기도 하고 부분만 따와서 새로 써 보기도 한다. 독자의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생산자, 창작자로 자기 재주를 드러낸다. 그렇게 생산된 작품의 질을 따지는 것과 별개로, 이런 사회 분위기가 조선 후기 백성들을 문화의 창조자로, 근대적 주체로 세워 갔다.
목숨을 버려야 지킬 수 있는 사랑! 비극의 시대를 노래한 <공작동남비>
중국 고대의 장시 <공작동남비>는 가족과 이웃이 개인의 자율성을 심각하게 위협해서 끝내 죽음으로 몰아간 비극을 노래했다. 자기를 지키고 믿음과 사랑을 지키는 길이 죽음밖에 없는 가난한 사람들의 운명을 추모했다.
난 지는 가난한 집 딸이나 인물 곱고 마음씨 착하며 손끝이 야무져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예단을 변변히 갖추어 오지 못하니, 시어머니 눈에 차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한마을 사는 부잣집 딸 진 씨를 며느릿감으로 탐낸 것이다. 그리하여 착하고 부지런한 며느리를 날마다 구박하여 삼 년 만에 집에서 내쫓아 버렸다.
중경은 난지에게 말했다.
“내가 그대를 저버리는 게 아니오. 어머니 성미가 급한 줄은 그대도 알 터이니 잠깐 친정에 가 있구려. 내 이제 관아에 가서 말미를 얻어 가지고 다시 올 터이니 그때까지만 참고 견디오. 곧 다시 돌아와 한집에 모일 터이니 내 말만 믿고 절대로 딴마음 먹지 마오.”
난지의 대답도 남편 못지않게 간절하다.
“새 로 수놓은 비단 저고리 장롱 안에 개켜 넣었고, 그 밑에 붉은 깁으로 만든 휘장도 있나이다. 이 상자 속에 낭군이 철 따라 갈아입을 옷도 갖가지로 만들어 넣어 두었나이다. 낭군이 다른 안해를 맞음 직하지 않삽기로 제 짧은 소견으로 장만해 둔 것이오이다. 이제 다가올 날의 인연은 없을 터이니 낭군은 제 마음을 헤아려 주소서.”
죄 없이 쫓겨난 난지가 친정으로 돌아가자, 그 고을 태수가 난지의 아름다움을 탐내어 제 며느리로 만들려고 권세로 위협하고 부귀로 유혹하였다.
난 지는, 딴마음 먹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던 남편의 말을 생각하며 괴로움을 이겨 나갔다. 그런데 친정 식구들까지 몰아대며 태수의 아들에게 시집보내려고 애를 썼다. 난지는 뜻을 굽히지 않았으나 더는 절개를 지키지 못할 처지에 이르렀다.
초중경은 “내 홀로 황천으로 돌아가리다.” 하고, 난지는 “낭군이 황천으로 가시겠다면 제 마음도 같나이다. 그럼 황천에서 만나십시다. 황천에서 우리 두 사람 서로 만나 지난날의 언약을 저버리지 마십시다.” 한다.
난지는 헤어지자마자 가난하고 권세 없는 제 처지를 한탄하며 치마를 뒤집어쓰고 연못에 빠져 죽었다. 중경도 부유한 이웃집 처녀에게 다시 장가들라는 어머니의 권고를 뿌리치고 스스로 동남쪽 나뭇가지에 목을 매었다.
이 시에서 조선 후기 백성들은 죽은 이들을 살려내어 가난한 백성의 인권을 다시 세우고 싶었던 것일까?
가난하고 불우한 연인, 천 년 뒤 환생해 부귀와 복록을 누리다
-인간 누구나 좇는 원초적인 욕망, 사랑과 부귀영화
소설에서는 두 연인의 무덤 둘레를 이렇게 낭만적으로 써 놓았다.
화산 곁에 둘이 한가지로 묻혀
동서로 소나무 잣나무 심고, 앞뒤로 두 그루 오동나무 심었네.
가지가지 덮이어 함께 엉키고, 잎새잎새 사귀어 서로 통했네.
<천 년을 돌아온 사랑>(원제, 란초재세기연록)에서 난지와 초중경은 석가세존께 소원을 빈다.
“저희 두 사람이 다시 인간 세상에 태어나 전생에 지키지 못한 약속을 지키고 전생에 누리지 못한 복을 누리게 해 주소서.”
“전생에 미천한 집 자식으로 태어난 탓으로 권세 있고 부유한 집의 핍박을 받아 스무 살 꽃 같은 나이에 내외가 함께 죽었사옵니다. 다음 세상에는 귀한 집의 귀한 자식이 되어 인간 복록을 갖추 누리게 해 주옵소서.”
사랑도 얻고 명예도 얻고 부귀도 얻고 싶다니!
이 너무도 현세적인 욕망을 읽으며, 철모르는 백일몽이라고 몰아붙일 수가 없다. 가난이 죄이러니! 가난한 백성들 귀에는 ‘안빈낙도’니 ‘안분지족’이니 하는 고상한 말은 들리지 않는다. 사실, 언제나 양반들이 사랑도 명예도 부귀도 다 독식하지 않았던가.
이 제 백성들은 더 이상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환생의 미학이 이렇게나마 현실에서는 이룰 수 없는 욕망을 충족시킨다. 이제 난지와 초중경의 후신인 문경 공주와 양인호는 황제와 재상가에 태어나 더없이 우아하고 재능 있고 도덕까지 갖춘 완벽한 인물로 움직이며 다시금 자기들의 인연을 다시 이으려고 찾아 나선다.
시 <공작동남비> 對 소설 <천 년을 돌아온 사랑>
국 문 필사본이 남에도 한 부 있다. 우아한 국문 문체로 이러한 부드러운 애정 소설을 써 내려갔다. 중국 문화가 조선에 들어와서 우리 언어로 옷을 갈아입고 소설로 다시 창작되는 것에서 학자들은 중국 문화의 유입과 변용 현상을 분석한다. 예컨대, 본디 시에서는 온 세상이 두 연인에게 적대적이었다면, 그래서 더없이 고상한 비극이라면, 소설에서는 세계가 둘로 나뉘어 경쟁을 한다. 악인의 세계 못지않게 주인공의 세계도 당당하게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주인공에게 든든한 여러 가지 재주와 능력과 적에게 맞설 방패가 있다.
원래 시에서, 제 처와 제집을 지키지 못한 남편 초중경은, 소설로 오면 이제 능력과 도덕을 갖춘 고귀한 인물이다. 악인을 제압하기에 충분한 능력과 인맥 따위의 모든 배경을 갖추었다.
소 설에 와서 왜 이렇게 달라졌을까? 격조 높은 시가 통속 대중 소설로 변화된 것일까? 장르가 변화된 것을 놓고도 따져볼 수 있다. 또 다른 편에서 보자면, 이것은 조선 후기 구성원들에게 희망이 생겨나고 있고, 가난한 자도 신분 상승을 꿈꿀 수 있다는 자각이 생겨나서이지 않을까 싶다.
<천 년을 돌아온 사랑>이 보여 주는 조선의 치부, 반칙이 판치는 과거 시험
임 란 이후 조선 사회는 여러 가지 사회경제적인 변화가 온다. 이 변화는 사회의 근간을 흔들기 시작했다. 소설은 이런 시기에 피어났다. <천 년을 돌아온 사랑>은 당대의 무능하고 부도덕한 양반 관료들을 악인으로 생생하게 그려 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 소설은 양반들 타락의 핵심을 과거 제도로 보았다. 조선의 과거 제도가 무엇인가? 재능있는 선비들을 등용하는 공정 경쟁 시스템이랍시고 사대부들의 자랑거리 아니던가. 그 과거 시험 비리를 노골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악인은, 주인공의 사랑과 부귀와 복을 가로채려고, 주인공의 글을 훔치고, 그것으로 과거 급제를 노린다. 시험 감독관을 만나 문제를 상의하는가 하면, 미리 답안을 써서 넘겨주지를 않나, 그 부정 부패의 과정을 꽤 세밀하게 보여 준다.
물론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자기에게 차례진 복을 되찾아 마침내는 복을 누린다며 마무리 짓지만, 조선 후기 과거장 비리가 이런 익명의 소설에서도 생생하게 재현될 만큼 문제가 심각했음을 고발하고 있다.
겨레고전문학선집을 펴내며
천 년 사무친 원혼 한 쌍
하늘이 내려 준 자식
구름다리에서 마주친 꽃나이 남녀
공작의 노래
환생
간교한 꾀
도둑맞은 전생연분
인도가 썼으나 인호의 시요
계수나무꽃을 머리에 꽂고
한 쌍의 원앙 다시 만나니
간사한 지상이 다 드러나니
자손을 거느리고 복록이 끝이 없더라
란초재세기연록 원문
이 소설에 관하여 - 지정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