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과 함께 찾아 온 사회 변화를 포착한
19세기를 대표하는 리얼리즘 시인, 조수삼
조선 후기에는 양반 지배질서가 흔들리는 것과 궤를 같이 하여, 문학에서도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난다. 일반 백성들이 사설시조를 즐기고, 소설 향유 인구가 급격히 늘어났다.
조 수삼(1762-1849)은 중인 신분의 시인으로 한시를 짓는 등 기존 상층 문학의 외피를 두르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조수삼의 시에서 주요하게 나오는 사람들은 도시의 저잣거리 인물들과 밭 갈고 길쌈 하는 생산 계급, 민란으로 피폐해진 가난한 농가들로, 이제껏 양반의 붓자루가 결코 포착하지 않던 인물과 삶의 현장을 향했다.
오늘날 조수삼은 중인 작가임에도 19세기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손꼽히고 있다. 문학사에서는 특히, 종로통에서 소설책을 읽어 주는 것으로 업을 삼은 노인(전기수傳奇叟)을 다룬 ‘기이편紀異篇’과, 홍경래 난을 겪으며 삶에서 유리되어 버린 비참한 백성들을 보며 쓴 시들을 주목한다.
저잣거리 사람들을 문학의 품안으로
‘기이편紀異篇’은 그동안 문학에서 다루지 않은 파락호, 난쟁이, 떠돌이 예술가, 망나니 같은 저잣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43명의 사람들에 대해 글과 시로 쓴 것이다.
빌 어먹으면서도 맹자를 외우는 늙은 총각 복홍, 붓이 아닌 손가락으로 그림을 잘 그린 장송죽, 저잣거리에서 이야기책을 읽어 주는 노인, 도적질을 하고는 매화 그림 한 장을 남기는 의적 일지매, 입으로 못 내는 소리가 없는 난쟁이 박뱁새, 재산을 다 털어 백성을 구제한 제주도 만덕.
이들은 가진 것 없고 이름도 없지만 저마다의 몫을 살아냈으며, 모두가 새로운 시대의 주인이었다.
‘애들과 부녀들은 안타까워 / 눈물까지 떨군다네. / 영웅의 승패가 어찌 될 건가 /
손에 땀을 쥐면서. / 재미나는 대목에서 말을 뚝 그치니 / 돈 받는 법 묘하구나. /
누군들 뒷말이 듣고 싶지 않으랴./’
- (본문 171쪽 ‘이야기책 읽어 주는 노인’에서)
평안도와 함경도 지역의 참상을 기록하다
19 세기는 조선 왕조의 부패와 무능이 극에 달했고, 삼정의 문란으로 백성들의 삶은 처참하였다. 이에 이곳저곳에서 민란이 많이 일어났다. 특히 서북 지방에서는 조선조 최대의 민란인 홍경래 난이 일어났다. 여행을 좋아했던 조수삼은 이때 이곳을 여행하면서 홍경래 난 직후의 서북 지방 백성들의 삶과 난리 뒤의 상처를 연작시 ‘농성에서〔隴城雜詠〕’에서 생생하게 담았다.
‘북행백절北行百絶'은 함경도 백성의 삶을 그린 백 편의 연작시다. 소외된 변방이기에 백성들이 더욱 심하게 고통을 겪고 있었다.
조수삼은 자기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가난한 백성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담았다. 백성들의 삶이 처참하다 보니 그 시대 사회의 문제점들이 고스란히 작품에 기록되었다.
삼정의 문란이나 서북, 동북 지역이 문학의 소재로 다루어지는 것도 드물었으므로 조수삼의 이 작품들은 아주 귀하다.
글쓴이와 옮긴이 -------------------------------------------------
글쓴이 조수삼
1762년에 태어나 1849년까지 여든여덟 해를 살았다.
일고여덟 살에 시 짓는 것을 배우고는 밤낮을 잊고 시를 지을 정도로 시를 좋아했다. 시 말고도 그림, 의학, 거문고, 바둑에 두루두루 재능이 뛰어났다. 중인 신분인지라 여든세 살에야 과거에 합격해 진사가 되었다.
조 수삼은 이야기를 좋아하고 여행을 좋아하였는데, 젊은 시절부터 온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며 보고 들은 것을 다 써 놓았다. 스물여덟 살에 중국에 처음 가기 시작하여 예순여덟 살까지 여섯 차례 중국에 다녀왔다. 조수삼은 젊어서는 삶의 진솔한 이야기나 자연을 소재로 따뜻한 시를 썼고, 나중에는 당대 사회 현실을 투철하게 묘사한 시를 많이 썼다.
홍경래 난을 생생하게 묘사한 장편시 ‘서구도올西寇檮杌’과 함경도 민중의 삶을 그린 연작시 ‘북행백절北行百絶’을 써, 1800년대 전반기의 소중한 기록을 남겼다. 저잣거리에서 보고 들은 사람들에 대해 쓴 연작시 ‘기이紀異’에는 조선 후기 민중들의 생활을 잘 갈무리해 놓았다. 그 밖에 중국, 일본, 베트남의 이야기들을 모아 기록한 ‘연상소해聯床小諧’, 중국과 여러 나라의 풍속을 짧은 산문과 시로 쓴 ‘외이죽지사外夷竹枝詞’ 등이 있다.
☞ 여항 시인 조수삼
조수삼은 19세기를 대표하는 여항 시인이다. 문학사에서 19세기는 ‘여항인閭巷人’이 새로운 작가로 등장하면서 문학 전반에 변화를 가져온 시기다. ‘여항’의 원래 뜻은 ‘백성들이 사는 거리, 골목’이란 뜻인데, 조선 후기에 와서 ‘여항인’은 경제, 문화 성장을 통해 사회 세력으로 형성된 서울의 중간 계급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조수삼은 재능이 많은 사람이었다. 조선 후기 화가이자 조수삼의 후배인 조희룡(趙熙龍, 1789~1866)은 《호산외기壺山外記》에서 “조수삼이 열 가지 복을 갖추었는데 사람들은 그 중 하나만 가지고 있어도 평생 부족할 게 없다고 여겼다.’고 했다. 열 가지 복이란 풍모, 시문, 과문, 의학, 바둑, 글씨, 기억력, 담론, 덕망, 장수로 조수삼은 이를 두루 갖추었다는 것. 그러나 중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이러한 재능도 그를 출세시킬 수는 없었다. 여든이 넘어서 과거에 급제, 진사가 되었을 뿐이다.
옮긴이 박윤원, 박세영
박세영은 1902년 경기도 고양에서 태어나 1989년까지 살았다. 1922년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25년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에 참가해 시를 쓰기 시작했다. 1938년 5월 첫 시집인 《산제비》를 시작으로 2천여 편의 작품을 발표했으며, 10여 권의 시집을 냈다. 1946년 월북하여 북조선문학예술 총동맹 출판부장 일을 맡아 했다. 북의 애국가 노랫말을 썼다고 알려져 있다.
박윤원은 남쪽에 알려진 것이 없다.
1부 내가 가진 것은
2부 이야기책 읽어주는 노인
3부 다섯 이랑 여덟 식구
4부 밭갈이와 길쌈 낳이
5부 땅은 남북으로 멀지만 백성은 한 핏줄기
6부 압록강 물 넘실넘실 흐르누나
7부 동쪽 나라 우리 땅은 극락 정토
8부 나를 사랑하는 이
9부 나는 대붕새를 부러워 않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