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혼란기의 현실주의자, 이제현의 울분과 그리움을 만난다
이제현의 문집은 우리 나라에서만 열다섯 번 새로 출간되었고, 중국과 일본에서도 거듭 출간될 만큼 동아시아 지식인들에게 두루 사랑받았다. 북경의 만권당에서 한족 학자들과 널리 어울리며 글을 썼으며, 고려의 대변인으로 다섯 차례나 중국을 오가면서 수많은 시를 남겼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백성들이 부르던 사리화, 거사련, 처용가 같은 노래를 기록으로 남겼으며, 기이한 이야기와 시화를 모아 《역옹패설》을 엮었다. 이제현의 시와 산문을 모아 엮은 《길에서 띄우는 편지》를 통해, 고려 말의 혼란기를 조국에 대한 애정으로 살아냈던 한 지식인의 내면을 확인할 수 있다.
동아시아 지식인들에게 고른 사랑을 받은 이제현
이 제현은 원나라의 지배를 받던 고려의 신하로 살면서 고려 정부의 대변인 역할을 했던 사람이다. 중국 곳곳의 이름난 곳을 찾아다니며 시를 읊고, 역사 속 인물의 고사를 두루 소재로 삼아 시를 써서 중국 문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원나라에 있으면서도 늘 고려를 그리워해서 중국 사람이 아니면 지을 수 없는 장단구 형식으로 ‘송도팔경’ 따위 시를 지어 고려의 산수를 널리 알리기도 했다. 금강산을 노래한 시를 남긴 것도 같은 뜻에서였다. 이제현은 중국 대륙을 두루 다니고 명승을 탐방할수록 고려를 더욱 그리워하여, “말과 수레 오고가는 함곡관 길에 / 몰아오는 먼지가 옷깃에 쌓이누나. / 이 세상 반쯤이나 두루 돌아다녔어도 / 마음은 물길 따라 고국으로 향하누나.” 하고 노래할 수밖에 없었다.
기울어가는 나라를 걱정하며 “미리 막지 못한 환란 부끄럽도다. 나라 운명 붙드노라 머리만 세었어라” 하고 노래한 ‘황토점에서’, “예로부터 사나운 탐욕 어질고 지혜로운 이를 가려 버리는가” 하고 탄식한 ‘비간의 묘’ 나 ‘명이의 노래’, ‘예양교’ 들도 유명하다.
백성들이 부르던 가요를 기록으로 남긴 이제현
이 제현은 민간에서 부르던 노래에 깊은 관심을 가져 ‘소악부 9수’와 ‘후소악부 2수’를 기록으로 남겼다. 고려 문학을 올바로 인식하고 새롭게 발전시켜 나가려는 시도의 하나로 소악부를 한시로 옮겨 적은 것이다. 이제현은 무신 정권이 끼친 해악을 극복하는 것과 나라의 자주성을 지키고 키워 나가는 일을 고민하는 한편, 고려 문학을 역사적인 시기에 따라 논하고, 새로운 문학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 심각하게 살폈다.
그 가운데 “요 못된 참새야 너 어디를 싸다니누. 한 해 농사 어떤 건지 모르고 / 늙은 홀아비 홀로 가꾼 밭인데 / 조며 기장이며 다 까먹어 치우누나.” 하고 노래한 ‘사리화’는 고된 부역과 가렴잡세, 권력자들의 약탈을 견디지 못한 백성들이 부르던 노래다. 위정자들을 비판하는 노래를, 기록하여 역사에 보존케 한 데서 이제현의 진보성과 애민 정신을 볼 수 있다.
문학을 통한 외교에 큰 공을 세운 이제현
이제현은 원나라의 이름난 문인들과 깊이 교류하고, 여러 임금을 섬기면서 고려가 자주성을 가지도록 노력하는 동시에, 문학을 통한 외교에 큰 공을 세웠다.
충 선왕이 귀양을 갔을 때는 원나라 조정에, 품위를 갖추고 이치에 맞는 표문을 보내 고려 왕의 지위를 튼튼하게 했다. 이제현이 중국 문학의 한 형식인 사(또는 장단구)를 자유롭게 창작하면서 문학적 역량을 일찍부터 인정받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현의 《익재집》이 한국은 물론 중국과 일본에서도 거듭 출간되고, 중국인의 저술에 자주 인용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마음은 물길 따라 고국으로 향하고
구름은 물에서 피어오르고
길에서 띄우는 편지
내 꿈은 그대 뒤를 끝없이 따라가리
혼탁한 세상 편치가 않구려
역옹패설 전편
역옹패설 후편
선비의 한 생애란 배타기와 같아서
이제현 연보
이제현 작품에 대하여 - 신구현
원문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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